요 11:38-44, 살아났으나 묶인 자여, 이제 함께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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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함께 걷자
요한복음 11장 43-4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 요한복음 11:43-44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떻습니까? 손과 발이 천으로 묶여 있고,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셨으면, 수의도 벗겨주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왜 그 상태로 나오게 하셨을까요?
(잠시 침묵하며 이 질문을 품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정체성이 가려진 상태로 무덤을 나왔습니다."
지난 3일간 우리가 함께 나눈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시겠습니까?
첫째 날, 우리는 '성실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성실함이 때로는 가장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만큼 하지 않으면 버림받을 것 같다"는 불안 때문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들볶는 것. 새벽기도를 빠지면 하루 종일 불안한 것. 그 불안이 '하나님을 사모해서'가 아니라 '뭔가 빠뜨린 것 같은 공포'에서 온다면... 그것이 첫 번째 수의입니다.
둘째 날, 우리는 '자책'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자책은 회개가 아니라 세련된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이런 내가 너무 싫어"라며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 하나님의 용서보다 내 기준이 더 높다고 고집 피우는 것. 그것이 두 번째 수의입니다.
셋째 날, 우리는 '익명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익명성이 자유가 아니라 감옥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 진짜 모습이 들킬까 봐, 상처받기 싫어서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 교회에 오래 다녀도 내 아픔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그것이 세 번째 수의입니다.
혹시 이 세 가지 중에 '아, 이건 나인데...' 하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셨습니까?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올 때 입고 있던 그 천, 수의는 죽은 자의 옷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시신을 긴 아마포로 감쌌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촘촘하게 감았습니다. 혼자서는 절대 벗을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특별히 얼굴을 가린 수건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가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나사로는 살아났지만, "생명은 있으나 정체성이 가려진 상태"로 무덤을 나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안에서 새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옛 정체성의 수건을 쓰고 삽니다.
"나는 실패자야."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내 과거 때문에 나는 영원히 이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해."
수의를 입고는 마음껏 달릴 수 없습니다. 수건을 쓰고는 자신이 누구인지 볼 수 없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풀어주라' 하셨을까요?"
본문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습니까? 맞습니다. 주변 사람들입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깊은 바다에서 오래 잠수한 다이버가 갑자기 수면 위로 올라오면 '감압병'에 걸립니다. 우리도 비슷합니다. 평생을 "잘해야 사랑받는다", "실패하면 버림받는다"는 고압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복음이라는 은혜의 수면 위로 올라오면 혼란스럽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거야?" 이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우리를 다시 익숙한 무덤 속으로 끌어당깁니다. 이때 곁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괜찮아. 은혜 안에 머물러도 돼."
서커스단의 코끼리는 어렸을 때 두꺼운 쇠사슬에 묶여 포기를 학습합니다. 다 큰 코끼리는 얇은 밧줄에 묶여 있어도 도망치지 않습니다. 우리도 "잘해야 사랑받는다"는 쇠사슬에 묶여 자랐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선포하지만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 자유를 믿지 못합니다. 이 구습은 혼자서는 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동체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공동체는 잘난 사람들이 모여 과시하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의 몸에 감긴 '불안'의 매듭을 풀어주고, 얼굴을 가린 '정죄'의 수건을 벗겨주는 '해방의 동역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예수님이 이미 다 이루셨어." "너는 새로운 피조물이야."
서로의 귀에 복음을 속삭여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일상을 활기차게 걷게 됩니다. 복음은 혼자 깨달을 수 있지만, 그 자유를 유지하는 것은 반드시 '함께'여야 합니다.
며칠을 함께 살아보니 어떠셨습니까? 서로의 장점도 보였을 것이고, 단점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 다른 교회에 다닙니다. 이름도 얼굴도 처음 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 시간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 놓았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재정을 기꺼이 드렸습니다.
무언가를 주기 위해 모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자기 몸에 감긴 수의를 풀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나는 괜찮아"라고 외쳐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익숙한 불안이 찾아옵니다. 그때 내 곁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괜찮아. 은혜 안에 머물러도 돼."
우리는 진짜 가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복음으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수의를 입었다가 풀림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내일이면 우리는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세상은 다시금 우리에게 수의를 입려 할 것입니다.
'성공의 수의' — "이만큼 성취해야 인정받는다."
'비교의 수의' — "저 사람보다 나아야 한다."
'익명의 수의' — "적당히 숨어서 안전하게 살자."
당신이 세상으로 돌아갈 때, 가장 먼저 다시 입게 될 '익숙한 수의'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그 수의를 벗는 것을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누군가의 헌신 덕분입니다. 내가 받은 이 은혜를,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흘려보낼 수 있겠습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자유를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첫째, 나 자신의 수의를 계속 벗어야 합니다.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괜찮아, 은혜 안에 머물러도 돼"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여야 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의 수의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보며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예수님이 다 이루셨어"라고 복음을 속삭여 주어야 합니다.
셋째,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을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우리와 같은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나의 시간과 재정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은 쉬운 결단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누군지도 모를 때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수의에 묶여 무덤에 있을 때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낼 차례입니다.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이제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옆에 계신 분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십시오. 짧게 한 문장이면 됩니다.
"주님, 우리가 이 수의를 벗기 원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수의를 풀어주는 가족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이 은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지난 4일간 우리를 이 자리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셨듯이, 우리도 종교의 무덤에서 불러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수의를 입으려는 유혹이 찾아올 때, 오늘 이 자리를 기억하게 하소서.
우리는 혼자 살기 위해 살아난 존재가 아니라, 함께 자유하기 위해 부름받은 복음의 가족입니다. 이제 서로의 수의를 풀어주며, 진짜 자유인으로 세상 속을 걸어가게 하소서. 우리의 시간과 재정과 마음을 기꺼이 드려, 제2, 제3의 리트릿이 계속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함께 자유하기 위해 부름받은 복음의 가족입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